모바일게임 [조조삼국전] 주요 캐릭터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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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자(字)는 운장(雲長,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繆侯, 壯穆侯라고도 쓴다)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忠義)와 무용(武勇)의 상징으로 여겨져 무성(武聖)이나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제성군(關帝聖君) 등으로 숭배되었고, 줄여서 관성제, 관제군, 관제, 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劉備)·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미염공(美髯公)이나 관이야(關二爺)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 하동군 해현(河東郡 解縣,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塩湖)인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 나라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는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염상(塩商)을 죽이고 유주 탁군(幽州 涿郡,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줘저우시[涿州市])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그의 호위관이 되었다.
유비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었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어 군대를 나누어 통솔했다.
유비와 관우, 장비는 형제처럼 관계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199년 유비는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胄)를 죽이고 하비성(下邳城)을 차지했고, 유비가 소패(小沛)로 귀환한 뒤에도 관우는 남아서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太守)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200년 조조(曹操)가 동정(東征)에 나서 유비가 원소(袁紹)에게 투항하자, 관우는 유비의 가족과 함께 조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아 후하게 대우했으며, 관우는 백마(白馬)에서 벌어진 원소와의 전투에서 장료(張遼)와 함께 선봉으로 나서 원소의 수하장수인 안량(顔良)을 죽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으나 관우는 조조를 떠나 다시 유비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유비와 함께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신야(新野)에 주둔했다.
208년 유표가 죽은 뒤 형주목(荊州牧)의 지위를 계승한 유종(劉琮)은 남하한 조조의 군대에 항복했다.
그러자 관우는 유비와 함께 하구(夏口)에 주둔하던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와 합류했다.
그리고 손권(孫權)과 연합해 벌어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형주의 남군(南郡)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전에서는 조조의 원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고, 유비가 강남의 무릉군(武陵郡)·장사군(長沙郡)·계양군(桂陽郡)
유비가 익주(益州) 정벌에 나섰을 때에도 관우는 형주에 남아 그곳을 지켰다.
215년에는 손권의 수하장수인 여몽(呂蒙)이 형주 공략에 나서 장사군·계양군·영릉군을 공격해오자 관우는 병사를 이끌고 출정해 익양(益陽)에 주둔했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漢中)을 공격해오자 노숙(魯粛)과의 담판으로 다시 손권과의 화친을 이끌어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뒤에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조인이 지키던 번성(樊城)과 여상(呂常)이 지키던 양양(襄陽)을 포위해 공격했다.
조조는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는데, 우금(于禁)이 이끌던 원병은 범람한 강물에 갇혀 관우의 포로가 되었다.
관우의 공세로 천도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협을 느낀 조조는 서황(徐晃)을 장수로 한 원군을 번성으로 보내는 한편, 강남의 영유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자신의 영토인 상관(湘關)에서 관우가 쌀을 공출해간 것을 구실로 관우의 배후를 기습해 형주의 남군을 점령했고, 관우는 조조와 손권에게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관우는 조조가 원군으로 보낸 서황의 군대에 패해 번성의 포위를 풀고 맥성(麥城)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중국 건안(建安) 24년 음력 12월에 임저(臨沮)에서 아들인 관평(關平)과 함께 손권의 군대에 붙잡혀 참수되었다.
손권은 그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몸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후베이성(湖北省) 당양(當陽)의 무덤은 관릉(關陵)으로, 그의 머리가 매장되었다는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무덤은 관림(關林)으로 불린다.
관우의 죽음에 분노한 유비는 221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 당양의 그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옥천산(玉泉山)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의 아들인 유선(劉禪)은 260년 관우에게 장목후(壯繆侯)라는 시호를 주었다.
관우에게는 관평 이외에 관흥(關興)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관흥에게는 관통(關統)과 관이(關彛)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263년 촉나라가 멸망했을 때 관우에게 죽임을 당한 방덕(龐德)의 아들 방회(龐會)가 관우의 후손들을 모두 몰살시켰다고 전해진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신장이 9척이나 되고, 붉은 얼굴에 2척이나 되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82근이나 되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휘두르고, 적토마(赤兎馬)를 탄 용맹한 장수로 묘사된다.
그리고 유비·장비와 의형제로 도원결의를 맺었고, 화타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화살을 맞은 어깨를 째서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하는데도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리고 맏아들인 관평은 양자로 기록되어 있고, 관색(關索)이라는 아들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은 모두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후대에 각색되어 덧붙여진 것들이다.
관우는 오래전부터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중국의 민간에서 각별히 숭배되었다.
송(宋)나라 이후에는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이나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교에서는 그를 협천대제(協天大帝)·복마대제(伏魔大帝)·익한천존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護法神)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伽藍菩薩)로 숭배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기도 했는데, 1601년(선조 34)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왕궁 인근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관왕묘(東關王廟)가 세워지기도 했다.
줄여서 동묘(東廟)라고도 불리는 동관왕묘는 1963년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제갈량]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며, 낭야군 양도현(瑯琊郡 陽都縣;山東省 沂南縣)에서 태어났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여,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零陵)·계양(桂陽)·장사(長沙) 등 3군(郡)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그러나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五丈原)에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조운]
조운(趙雲, ? ~ 229년 11월)은 중국 후한 말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삼국 시대 촉(蜀)나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
자룡은 자고, 이름은 운(雲)이다.
처음에는 공손찬(公孫瓚) 수하에 있었는데, 공손찬이 원소(袁紹)에게 망한 뒤 유비(劉備)에게 귀순했다.
유비의 경호원으로 여러 번 유비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취했을 때 유비가 패주하자 감부인(甘夫人)과 아두(阿頭, 劉禪)를 구하기 위해 조조의 대군을 혼자 휘젓고 다니며 호위해 구출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도 이때 생겨났다.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옮겼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공격했을 때 제갈량(諸葛亮)을 따라 장강(長江)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 군현을 평정했다.
촉 일대가 평정된 뒤 익군장군(翊軍將軍)이 되었다.
유비가 오(吳)나라를 정벌할 때 간언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우(關羽)는 오만하고 장비(張飛)는 포악해서 둘 다 목 없는 귀신이 되었지만, 그는 원만한 성격으로 끝까지 용맹을 떨치고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유선이 즉위했을 때 중호군(中護軍)과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내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중국사를 통해 창술(槍術)에 뛰어난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대교]
후한 말의 인물. 강동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이교 자매 중 언니. 교국로의 딸, 손책의 아내.
주유전에 따르면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환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교국로)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들였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들였다.
아무리 봐도 정식적인 결혼이 아니라 약탈혼이며 정사에서는 주로 첩실을 들일 때 사용하는 納이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있어서 첩실로 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주유에게 "교공의 두 딸이 비록 떠돌게 되었으나 우리 둘을 사위로 삼았으니 역시 충분히 기뻐할만 할 것이다."
라는 농담을 했는데 이것만 봐도 대교, 소교를 맞이한게 정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포로로 잡은 상태에서 당사자인 대교, 소교는 물론이고 이들의 아버지인 교공의 의중을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억지로 대교, 소교를 첩실로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대교는 결혼 1년도 안되어서 과부가 되어 버리고, 소교도 10년이 지난 후 과부가 되어 버린다.
삼국지연의에서 대교와 소교는 손책과 주유의 정실 부인들로 취급된다.
대교는 오국태와 함께 손책이 우길을 죽이려하는 것을 만류하였고, 손책의 임종 때 제부(弟夫) 주유에게 후사를 부탁하도록 유언 받았다.
제갈량이 주유에게 조식이 지은 동작대부란 시를 살짝 바꿔서 조조가 이교를 원한다는 시로 전하자 격노한 주유는 조조와의 결전을 단행한다.
그런데 조조가 단가행을 읊기 직전에 교국로와 친분이 있었던 시절부터 조조가 이교 자매를 모두 키잡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 전에 손책과 주유가 가로챘다며 안타까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진짜로 조조는 이교 자매를 노리고 있었던 것.
손책과 주유의 환성 공략 직전까지 대교, 소교는 교공과 함께 지냈다는 걸 추측할 수 있기에 그 당시 대교, 소교 모두 아직 결혼 적령기에 이르지 못한 15세 전후의 나이이거나 아예 그보다도 어린 나이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육손의 장모라는 의견이 있지만 대교의 딸이 육손에게 시집갔다는 말은 정사에서 찾을 수 없다.
육손은 손책의 딸 손씨와 결혼했다고만 나온다.
정사에서 시집보낸 손책의 딸은 3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교와 손책의 결혼 생활은 채 1년도 안되어 손책의 죽음으로 끝났다.
시간상으로 보면 맞지 않으니 손책에게 따로 정실이 있던가, 부인이 여럿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황상 더 맞을 것이다.
애초에 손책이 대교를 맞아들이던 시점엔 당시엔 노총각 취급을 당하는 25세였기에 이때까지 손책에게 부인이 없었다는 것도 정황상 맞지 않다.
경극 봉황이교(鳳凰二喬)에서는 교정(喬静)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녀 중 한명이기 때문인지 민담이나 야사에도 종종 등장을 하는 편이며, 이런류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지역마다, 이야기마다 성격이 모두 제각각이다.
한 때 삼국지 재해석이 한창이던 시절 새로운 삼국지의 면모를 알린다며 민담이나 야사 등을 수록한 책들이 여럿 출판되면서 국내에도 일부나마 알려진 편이다.
삼국지연의에서의 등장은 거의 없지만 기구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보니 등장하는 민담마다 이게 과연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는게 맞는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확연히 다른 캐릭터들로 등장한다.
한 이야기에서는, 동생과 함께 몸소 창을 들고 도적과 맞써 싸우는 와중에 지나가다 그걸 보고 도움을 준 손책, 주유에게 반해 결혼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이야기에선 이름도 따로 언급되는데 대교는 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소교는 천. 즉 교완, 교천 자매인 셈. 싸우는 미녀 타입이며, 어찌보면 민담에서 재창작되는 전형적인 형태 중 한 유형이다.
다른 이야기에선 위의 침공을 앞두고 싸우느냐 항복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는 손권에게 적절한 조언을 하여 전쟁을 결심하게 하는 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선 현명한 형수님 역인데, 이 역시 은거해있던 현숙한 미녀가 주인공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 준다는 민담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의외로 막장성 짙은 민담도 있는데, 여기선 소교를 질투하는 못난 언니역이다. "넌 잘난 서방님과 알콩달콩 잘 살지만, 난 1년만에 과부가 되었다."라며 열폭하는데 상대적으로 침착한 대응을 하는 소교에 비하면 딱 성질 더러운 언니 타입...^^;
[소교]
후한 말의 인물. 강동 최고의 미녀라 불리는 이교 자매 중 동생. 교국로의 딸, 주유의 아내.
민담에서는 지은 죄도 없이 악처가 되었다.
정치 탓에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주유를 미워하는 악녀로 그려지거나, 아예 바람둥이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주유가 제갈량의 격노계를 꿰뚫어 보고 거꾸로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낸 후 관 속에 숨어 있다 문상하러 오는 제갈량을 없애려는 계책을 세웠는데, 어찌어찌하다 소교가 관의 숨구멍을 막아 버려서 진짜 죽어버렸다는(...) 충격적인 야사도 존재.
삼국지평화에서도 별로 좋게 묘사되지 않으며 주유가 소교의 여색에 너무 빠져서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경극 봉황이교(鳳凰二喬)에서는 교완(喬婉)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견씨 (문소왕후)]
문소황후 견씨는 중국 삼국시대 위의 초대 세조 문황제 조비의 정비로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상채현 현령 견일의 딸로써 중산군 무극현의 태생이다.
견후 또는 견씨라고도 부르며, 일본식 표현으로 견희라고도 한다.
3남5녀 중의 막내딸로 오빠들의 이름은 예, 엄, 요이고 언니들은 강, 탈, 도, 영이다.
황후 자신의 이름은 복, 다른 설에는 낙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근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동탁]
자(字)는 중영(仲穎)이며 농서군(隴西郡) 임조현(臨洮縣, 지금의 甘肅省 岷縣) 출신이다.
소제(少帝)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한 뒤에 공포정치를 행해 후한(後漢)의 멸망을 가속화하였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탁전(董卓傳)’에 따르면, 동탁은 젊은 시절에 유협(遊俠)을 숭상하여 강족(羌族)이 사는 곳을 방랑하며 그들과 사귀었다.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강족의 우두머리들이 찾아오자 농사짓던 소를 잡아서 대접했고, 동탁의 후한 대접을 감사하게 여긴 강족은 그에게 1,000마리의 가축을 주었다.
환제(桓帝) 말년에 농서 등 6개 군(郡)에서 양가(良家)의 자제를 선발하여 우림랑(羽林郎)으로 임명했는데, 동탁은 재능이 있고 무예가 뛰어나 이에 선발되었다.
그리고 사마(司馬)로 임명되어 중랑장(中郎將) 장환(張奐)이 병주(幷州)의 강족을 토벌할 때에 공을 세워 낭중(郎中)으로 승진했다.
당시 그는 포상으로 받은 비단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동탁은 그 뒤 광무령(廣武令), 촉군북부도위(蜀郡北部都尉),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병주자사(幷州刺史), 하동태수(河東太守) 등을 지냈으며, 184년에는 중랑장(中郎將)으로 임명되어 황건군(黄巾軍)의 토벌에 나섰다.
전투에서 패해 파직되었으나 그해 겨울 양주(涼州)에서 한수(韓遂)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당시 농서로 갔던 토벌군 가운데 동탁의 부대만 무사히 귀환하여 동탁은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되고 태향후(斄鄉侯)로 봉해졌으며 병주목(幷州牧)을 겸하게 되었다.
189년 영제(靈帝)가 죽고 그의 장남인 소제(少帝) 유변(劉辯)이 즉위하자,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은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리는 환관들을 없애기 위해 몰래 각지의 장수들에게 낙양(洛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살해되었고, 환관인 단규(段珪) 등은 소제와 그의 동생인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을 인질로 붙잡고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동탁은 군대를 이끌고 북망(北芒)에서 소제와 진류왕을 구출하여 낙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하진의 부대를 흡수하고, 여포(呂布)를 시켜 정원(丁原)을 죽인 뒤에 그의 군대도 병합하여 낙양의 군사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그 뒤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는 태위(太尉)가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켜 홍농왕(弘農王)으로 삼고, 9살인 진류왕 유협을 왕위에 앉혔다.
헌제(獻帝)를 옹립한 뒤에 동탁은 미후(郿侯)로 봉해졌으며, 상국(相国)이 되어 전횡을 부렸다.
그는 황제를 만날 때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궁 안에 들어갔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지양군(池陽君)으로 봉해 군주와 마찬가지로 가신(家臣)을 둘 수 있게 했다.
190년 동탁은 수도를 낙양에서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고, 태사(太師)의 자리에 올라 상보(尙父)라고 불렸다. 그는 황제가 타는 수레를 탔으며, 동생인 동민(董旻)을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하고 호후(鄠侯)로 봉했다.
그리고 조카인 동황(董璜)은 시중(侍中)과 중군교위(中軍校尉)로 임명해 군을 이끌게 했다.
또한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동탁오수전(董卓五銖錢)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동전을 만들어 화폐 유통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동탁은 192년 부하 장수인 여포에게 살해되었다. 여포는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상서복야(尚書僕射) 사손서(士孫瑞)와 함께 동탁의 암살을 모의하여, 동탁이 헌제를 만나기 위해 미앙전(未央殿)에 왔을 때 기도위(騎都尉) 이숙(李肅) 등을 시켜 동탁을 습격하게 하여 그를 죽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동탁에 대해 “탐욕스럽고 모질고 잔인하여 포학하고 어질지 않았으니 글자로 나타낸 뒤로 이러한 자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동탁은 성격이 잔인해 가혹한 형벌로 사람들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보복했다고 한다.
≪삼국지≫에는 동탁이 관리들을 모두 모아놓은 자리에서 북지군(北地郡)의 항복한 포로 수백 명을 끌고 와서는 그들의 혀와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아 큰 가마솥에 삶게 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도 동탁은 태연하게 계속해서 술과 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마등]
'마초'아부지~
후한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
복파장군 마원(馬援)의 후손으로, 자는 수성(壽成)이다.
처음에 양주자사(凉州刺史) 경비(耿鄙) 군대의 사마(司馬)를 지냈는데, 일찍이 저강(氐羌)의 반란을 진압했다.
나중에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옮겼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13년(208) 입조(入朝)하여 위위(衛尉)가 되었고, 괴리후(槐里侯)에 봉해졌다. 장안(長安)이 동탁(董卓) 잔당들의 손에 넘어갔을 때 근왕병을 이끌고 올라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후 조조(曹操)의 횡포를 미워하여 동승(董承)을 통해 옷깃 속에 조서(詔書)를 숨기고 귀향하여 군대를 길렀다.
적벽대전 뒤 조조는 설욕을 위해 남침하고 싶었지만 그의 후방 교란이 염려되어 망설이고 있을 때 순유(荀攸)가 꾀를 내어 허도(許都)로 불러 올렸다.
마등은 이 기회를 이용해 조조를 치려고 했지만 탄로나 부자가 함께 죽임을 당하고 형의 아들 마대(馬岱)만이 목숨을 건져 서량으로 도망쳤다.
정사(正史) 『삼국지』에 따르면 그는 동승의 조조 제거 계획에 참여한 적이 없고, 16년(211) 조조가 한중(漢中)을 공격하자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오인해서 대항하다 패해 죽었다.
[사마의]
자(字)는 중달(仲達)이며,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지금의 河南省 溫縣 招賢鎭) 출신으로,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사마방(司馬防)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魏) 나라의 조조(曹操, 155~220, 武帝로 추존), 조비(曹丕, 文帝 재위 220~226), 조예(曹叡, 明帝 재위 226~239), 조방(曹芳, 哀帝 재위 239~254, 齊王이라고도 함) 등 4대(代)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舞陽侯)에 봉해졌다.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236~290)이 서진(西晉)을 세운 뒤에는 선제(宣帝)로 추존(追尊)되었고, 묘호(廟號)를 고조(高祖)라 하였다.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 때 정서장군(征西將軍)을 지낸 사마균(司馬鈞)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관(高官)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늘 깊이 간직하고 따랐다(服膺儒敎)"고 전해진다.
형인 사마랑(司馬朗)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이른바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마의(司馬懿)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조(曹操)가 이를 듣고 등용하려 했지만 병이 들었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208년(建安 13년) 승상(丞相)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文学掾)으로 삼았고, 그 뒤 그는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조가 위왕(魏王)으로 봉해진 뒤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조비(曹丕)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둔전제(屯田制)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魏)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산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224년에는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226년 조비가 죽자, 조진(曹眞)ㆍ진군(陳群)ㆍ조휴(曹休) 등과 함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명제(明帝) 조예(曹叡)를 보좌하였다.
231년 조진이 죽은 뒤에는 대장군(大將軍)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이끄는 촉군(蜀軍)의 공격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구검(毌丘倹), 호준(胡遵) 등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요동(遼東) 지역을 위(魏)에 병합하였다.
239년 명제(明帝)가 임종할 때 조진의 아들인 조상(曹爽, ?~249)과 함께 애제(哀帝) 조방(曹芳)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전임시키며 군권(軍權)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는 오(呉)의 공격을 물리치며 기병(騎兵)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병이 든 것처럼 꾸미며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으나, 249년(正始 10년) 조상(曹爽)이 애제(哀帝)와 함께 고평릉(高平陵)을 방문한 틈을 타서 정변(政變)을 일으켜 조상(曹爽)을 살해하고, 위(魏)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으나, 251년(嘉平 3년)에 병으로 죽었다.
[손부인]
손부인은 손견의 딸이며, 손책, 손권의 이복 여동생이자 유비의 부인이다.
손상향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이것은 경극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인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에서는 손부인이라고 기록되고 있고, 실제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오국태의 딸이다.
[여포]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무장(武將)으로 지금의 네이멍구자치구[内蒙古自治區] 주위안구[九原區]인 오원군(五原郡) 구원현(九原縣) 출신이며, 자(字)는 봉선(奉先)이다.
<삼국지(三國志)>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에서 후한(後漢) 말기의 군웅(群雄) 가운데 무용(武勇)이 가장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궁술과 승마술이 뛰어나 전한(前漢) 시대에 흉노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광(李廣, ?~BC 119)과 함께 '비장(飛將)'으로 불리는 무명(武名)을 떨쳤다.
<삼국지(三國志)>에 주(註)로 인용되어 있는 '조만전(曹瞞傳)'에 따르면 민간에서는 그가 탔다고 전해지는 적토마(赤兎馬)와 함께 "사람 가운데는 여포, 말 가운데는 적토마(人中呂布 馬中赤兔)"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절개가 없으며 물욕이 많아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에 따르면, 여포는 하내(河内, 지금의 河南省 鄭州)에 주둔했던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 ?~189)의 가신(家臣)으로 그 무용이 높이 평가되어 주부(主簿)로 중용되었다.
189년 후한의 영제(靈帝, 재위 167~189)가 죽은 뒤 십상시(十常侍)를 제거하려 한 대장군 하진(何進, ?~189)의 부름으로 정원(丁原)과 함께 도읍인 뤄양[洛陽]으로 갔다.
조정의 실권을 놓고 정원과 동탁(董卓, ?~192)이 대립하자, 동탁의 편에 서서 정원을 살해하였다.
그 뒤 동탁의 신임을 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기도위(騎都尉),중랑장(中郎將)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도정후(都亭侯)로 봉해졌다.
하지만 동탁이 뤄양을 파괴하고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으로 천도하는 등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폭정을 하자, 사도(司徒) 왕윤(王允)과 모의하여 동탁을 살해했다.
그리고 헌제(獻帝, 재위 189~220)에게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임명되고 온후(温侯)로 봉해졌지만, 동탁의 출신지인 양주(涼州, 지금의 甘粛省 지역)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을 공격해온 곽사(郭汜), 이각(李傕)에게 패하여 무관(武關)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여포는 형주(荊州)의 남양(南陽, 지금의 河南省 南陽)에 주둔하고 있었던 원술(袁術, ?~199)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하북(河北)에서 흑산적(黒山賊)과 대치하던 원소(袁紹, ?~202)와 합세하였다.
여포의 부대는 장연(張燕, 153~?)이 이끌던 흑산적을 격파하였지만 약탈을 일삼아 원소의 불만을 샀다.
원소가 죽이려하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 ?~195)에 의지하였다가, 다시 하내(河内)로 가서 장양(張楊)에 의지하였다.
193년, 조조(曹操, 155~220)가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자, 여포는 장막과 함께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兗州, 지금의 山東省 兗州)를 공격해 그 대부분을 점령하고 연주목(兗州牧)이 되었다.
그러나 195년 조조의 군대에 패하여 연주에서 퇴각하여 도겸(陶謙)에게 서주(徐州, 지금의 江蘇省 徐州市 일대)를 물려받은 유비(劉備, 161~223)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유비가 원술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유비의 본거지인 하비(下邳, 지금의 江蘇省 邳州市)를 빼앗고, 스스로 서주자사(徐州刺史)라고 칭했다.
소패(小沛)로 물러난 유비가 구원을 청해오자 여포는 원술의 무장(武將)인 기령(紀霊)과 유비 사이의 화해를 중개하였으나, 그 뒤 다시 유비를 공격해 소패를 빼앗았고, 유비는 결국 조조에 의지하게 되었다.
서주(徐州)에 자리를 잡게 된 여포는 한때 혼담을 주고받으며 원술과 연합을 추진했지만, 혼담을 깨고 조조와 손을 잡았다.
화가 난 원술은 대군을 보내 여포를 공격했지만 크게 패하고 물러났으며, 여포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에게 좌장군(左將軍)의 직위를 받았다.
198년 여포는 다시 원술과 손을 잡고, 소패의 유비를 공격했다. 조조가 유비에게 원군을 보냈지만, 소패는 함락되었다.
그러자 조조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주(徐州)를 공격했다.
여포는 하비성(下邳城)에서 조조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3개월 동안 농성전(籠城戰)을 벌였지만, 결국 부하인 후성(侯成), 송헌(宋憲), 위속(魏續)의 반란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전위]
전위(典韋, ? ~ 197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기오현(己吾縣) 사람이다.
192년, 하후돈(夏侯敦)의 추천을 받아 조조(曺操)를 섬긴다.
이후 그는 많은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으나 197년, 완(宛)성에서 조조(曹操)의 군세에 잔뜩 겁을 먹은 장수(張繡)가 항복하게 되는데, 그 후에 경계를 늦춘 조조군의 틈을 탄 장수 '가후(賈詡)'의 모략에 빠진다.
조조의 군세가 크게 불리하여 조조는 경기병을 이끌고 도망쳤고, 전위와 그의 수하들이 접근을 막았다.
병사들의 창검을 빼앗아 적을 베어 넘겼지만 병졸들의 무기가 전위가 쓰기에는 너무 약해 10여개의 창검이 부러지자 전위는 맨몸으로 달려들어 적을 때려죽였고 보다 못한 장수가 활을 써서 전위를 사살한다.
그러나 전위는 눈을 부릅뜨고 선 채 죽었기 때문에 장졸들이 그 모습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옆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조조가 무음(舞陰)으로 퇴각해 주둔해 있다 전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도중에 상을 치르고 직접 나가서 곡하였고, 양읍(襄邑)에 돌려 보내어 장사지내고, 그의 아들 전만(典滿)을 배수해 낭중(郎中)으로 삼았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조조는 장남 조앙(曹昻)과 조카 조안민(曹安民)을 잃은 것보다 전위를 잃은 슬픔이 더 크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조]
자(字)는 맹덕(孟德), 아명(兒名)은 아만(阿瞞)ㆍ길리(吉利)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安徽省 亳州市) 사람으로 후한 헌제(獻帝, 재위 189~220) 때에 승상(丞相)을 지냈으며, 위왕(魏王)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조비(曹丕)가 위나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조조는 후한 환제(桓帝, 재위 146~168) 때인 155년(永壽 원년)에 태위(太尉)를 지낸 조숭(曹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숭은 4대의 황제를 섬겨 환제 때에 비정후(費亭侯)로 봉해진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였다.
배송지(裴松之)는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달며 양자가 되기 전 조숭의 본성은 ‘하후(夏侯)’였고, 따라서 조조와 하후돈(夏侯惇)이 종형제 관계라는 해석을 남기기도 했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주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시부(詩賦)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두 아들인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함께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조조는 20세 때인 174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 돈구현령(頓丘縣令), 의랑(議郎) 등을 지냈다.
184년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반란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제남(済南)의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89년 영제(靈帝)가 죽은 뒤,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워 정권을 장악한 동탁(董卓)이 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았다.
그는 190년 원술, 손견 등과 연합하여 동탁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했으며, 발해태수(勃海太守) 원소(袁紹)가 맹주가 된 반동탁 연합군에서 분무장군(奮武將軍)의 직위를 맡았다.
192년 동탁이 살해된 뒤 조조는 연주(兗州)를 평정하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년 헌제가 장안(長安)을 탈출하였을 때, 순욱(荀彧)의 건의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 일로 조조는 건덕장군(建德將軍), 진동장군(鎭東將軍) 등에 임명되었고, 양조부인 조등과 마찬가지로 비정후로 봉해졌다.
196년에는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許縣, 지금의 河南省 許昌)에 궁을 지어 헌제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 뒤 조조는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무평후(武平侯)로 봉해졌다.
그는 헌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후한 조정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황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조는 한호(韓浩)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위(魏)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조는 202년 원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원소의 근거지인 하북(河北) 지방 공략에 나섰고 207년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다.
208년 승상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중국 통일을 위한 남정(南征)에 나서 형주(荆州)를 점령하였으나, 적벽에서 손권(孫權)과 유비(劉備) 연합군에 패하여 형주의 일부를 도로 내주었다.
그 뒤로도 조조는 여러 차례 관중(關中)과 한중(漢中) 지역을 공략하며 중국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13년 조조는 위공(魏公)으로 봉해졌으며, 216년에는 스스로를 위왕(魏王)으로 봉하고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하였다.
그는 220년 3월 15일(建安 25년 1월 23일)에 병으로 낙양에서 죽었는데, 죽은 뒤 무왕(武王)의 시호를 받았으며, 4월 11일에 업성(鄴城)의 고릉(高陵)에 묻혔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위왕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되었으며, 조조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고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았다.
[주유]
후한시대 고급관리인 태위를 2명이나 배출한 명문집안 출신이며 노강군 서현에서 175년에 출생하였다. 자(字)는 공근(公瑾)이다.
손견(孫堅)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서 거주지를 서(舒)로 옮기자 주유는 집과 부지를 제공하였다. 이때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동갑(同甲)으로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처음 손견을 섬기다가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을 섬겨 양쯔강[揚子江] 하류 지방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손책과 함께 형주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교공(橋公)의 두딸을 포로로 생포하였다.
이들은 절세의 미인으로 언니 대교(大橋)는 손책의 아내가 되었고 동생 소교(小橋)는 주유의 아내가 되었다.
200년 손책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손권(孫權)이 등극하였고 주유는 손권을 충실하게 보필하였다.
208년(建安 13년) 9월, 위(魏)의 조조(曹操)가 화북(華北)을 평정하고 형주(荊州)로 진격해 오자, 노숙(魯肅) 등과 함께 항전(抗戰)을 주장하며 강화론자(講和論者)들에 맞섰다.
손권을 설득하여 군사 3만을 주면 조조를 격파하겠다고 장담하였다.
마침내 손권을 설득하여 오나라 대도독(大都督)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화공(火攻)으로 위군(魏軍)을 대파하였다.
그 뒤 지금의 쓰촨분지[四川盆地] 일대인 익주(益州)를 점령하여 촉(蜀)을 병합하고 조조(曹操)의 위를 점령하여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주유가 구상한 천하 이분지계이다. 주유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장링[江陵, 湖北省 荊州]으로 귀환하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주태]
삼국 시대 오나라 회남(淮南) 하채(下蔡) 사람.
자는 유평(幼平)이다.
처음에 손책(孫策)을 따라 정벌에 나서, 그 공으로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산월(山越)을 정벌했다.
손권(孫權)을 수행하여 선성(宣城)을 지켰는데 갑작스런 습격을 만나자, 죽을힘을 다해 손권을 구하고 자신은 12군데나 창에 맞았다고 한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싸움터에 나가 전공을 세웠다. 춘곡장(春谷長)에 올랐다.
손권은 자신을 도와주고 보호해준 공을 생각하여 청라산(靑羅傘)을 하사하고 궁궐을 나가고 들어올 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나중에 황조(黃祖)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고, 주유(周瑜)와 함께 적벽(赤壁)에서 조조(曹操)를 격파했다.
남군(南郡)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고, 유수(濡須)에서도 조조를 물리쳤다.
한중태수(漢中太守)와 분위장군(奮威將軍)을 지냈고, 능양후(陵陽侯)에 봉해졌다. 병사했다.
[초선]
산서(山西) 흔주(忻州) 사람, 혹은 하북(河北) 한단(邯鄲) 사람으로 후한 시기 왕윤(王允; 137~192)의 수양딸이다.
왕윤의 지시로 동탁(董卓)과 여포(吕布)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역할을 했다.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왕소군(王昭君)과 더불어 고대 ‘사대미인(四大美人)’으로 일컬어진다.
[하우돈]
하후돈은 중국 후한 말 조조 휘하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자는 원양이며 패국 초현 사람이다.
조조가 거병할 때부터 도왔고 조조와 같은 해에 죽었다.
주로 후방에서 거점 방어를 맡아 조조가 안심하고 친정할 수 있게 했다.
전투 중 한쪽 눈을 잃은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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